중국 이야기 2025. 10. 30. 21:01

중국고대의 4대 미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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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꼽히는 서시西施(생사년 미상)는,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이며, 중국 고대 4대 미녀 중 으뜸으로, '서자(西子)'라고도 한다.

저장성 주지시 저라촌浙江诸暨苎萝村(현재 주지시 성남 완사촌诸暨市城南浣纱村)에서 자라며 중국 춘추 말기의 미녀이다.

아버지는 장작을 파는 일을 하고, 어머니는 완사浣纱로 생계를 유지하며, 시씨 후손은 완사계 강가에 살고 있다.

거서촌居西村은 서시라는 이름을 얻었고, 상완사 우계 때문에 완사녀라고도 불린다.

서시는 가난한 출신으로 자태가 있고 아름다움이 뛰어났으며, 월나라가 패전한 후 미녀로 선발되어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는 그를 위해 춘소궁春宵宫, 관와각馆娃阁, 영관灵馆 등의 궁전을 지어주었고, 그가 "내리는 신춤"에 능숙하여 신랑을 쌓았다.

월왕 구천이 와신상담을 하다가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서시는 행방이 묘연하여 바다에 가라앉아 죽었거나 범려와 은거했다는 설이 있다.

그 전설은 오월의 패권 쟁탈을 배경으로 하며, 《동시효빈》东施效颦 등 인물 전설과 지명, 물산, 풍속 전설을 포함하고 있다.

2006년 6월에 첫 번째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 미모를 "침어"라고 표현하며, 왕자오쥔王昭君, 초선貂蝉, 양위환杨玉环과 함께 "침어락안, 감은 달빛, 부끄러운 꽃"“沉鱼落雁,闭月羞花이라고 부른다.

 

 

세 번째의 양옥환杨玉环(719년-756년), 호는 태진太真, 당대 궁정 음악가, 무용가로 중국 고대 4대 미녀 중 한 명이다.

본관은 홍농화음弘农华阴(현재 산시화음陕西华阴)이며, 그의 아버지 양현염은 촉주의 사호蜀州司户를 역임했다.

양옥환은 우리가 잘 아는 양귀비를 말한다.

개원 23년(735년)에 수왕 寿王李琩을 비자로 삼고, 개원 28년(740년)에 칙령을 받아 여도사로 출가하였으며, 천보 4년(745년)에 당 현종에 의해 귀비로 책립되었다.

노래와 춤에 능하고 음률이 높으며, 총애를 받는 동안 자매는 모두 국부인(國夫人)에 봉해졌고, 족형 양국충(楊國忠)은 재상 에 이르렀다.

천보 15년(756년) 안사의 난安史之乱에서 현종의 서쪽을 따라 마외역马嵬驿으로 도망갔을 때 금군이 반란을 일으켰고, 양국충이 살해된 후 양귀비는 불당에서 목이 졸려 죽었다.

향년 37세였다. 그의 무덤은 현재 산시성 싱핑의 마웨이포陕西兴平马嵬坡에 남아 있으며, 일본 야마구치현의 논쟁적인 기념묘이다.

출생지 기록은 푸저우 융러, 쑤저우 도강, 룽저우 등 여러 지역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사록기(史錄氣)는 영왕옥적(寧王玉笛)을 사사로이 불어서 두 번이나 저택으로 송환되었으나, 결국 모두 다시 입궐하였다.

민간에서는 '귀비취주'“贵妃醉酒, '비자소' “妃子笑”등의 고사가 그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정사에는 양귀비가 마외파 반란으로 죽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야마구치현 나가토시 유야초의 이존원에는 "양귀비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오륜탑이 실제로 존재하며, 현지 전설에 따르면 양귀비는 죽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이런 것으로 인하여 중일 양국간에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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