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보산묘역 (八宝山公墓埋)
중국의 강택민(江澤民 장저민)이가 죽었다.
시진핑이 그의 장례식장인 팔보산八宝山까지 가서 고인의 죽음을 애도 하였다.
그래서 팔보산묘역八宝山公墓에 대하여 알아볼까 한다.
팔보산묘지는 스징산(石景山)에 있는 베이징(北京)의 주요장례식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혁명묘지(革命公墓)와 인민묘지(人民墓埋), 장례식장과 유골을 보관하는 납골당이 있다.
혁명묘지革命公墓는 국내에서 가장 규격이 높고 명성이 높으며 붉은색으로 되어있고 교육자원이 풍부한 공동묘지이다.
팔보산 혁명묘지는 저우언라이(周来來) 총리의 지시로 1950년 스징산(石景山)구 팔보산(八寶山) 부지에 조성됐으며, 적토· 내화토· 청회(靑等) 등 8종의 광물이 풍부해 '팔보산혁명묘지'(八宝山革命公墓)로 명명됐다.
팔보산 혁명묘지에 안장할 수 있는 사망자는 엄격한 규정이 있는데, 팔보산혁명묘지 건립 초기에는 당과 국가지도자, 민주당파 지도자, 애국민주인사, 저명한 과학자, 문학가, 고급공정기술자, 국제우인, 혁명열사, 현단급 이상 지도간부의 안장을 허가했다.
팔보산 혁명묘지는 안장 인원에 대한 제한은 물론 고인의 묘역도 현급 이상 간부 및 혁명군인단급 이상 간부 등 엄격한 구분을 하고 있으며 묘지 길이는 12척(4m), 너비는 6척(2m) 또는 길이 12척, 너비는 12척이다.
성급 이상 간부 및 혁명군인군급 이상 간부, 묘지 길이는 18피트(6m), 너비는 18피트 또는 길이 24피트(8m), 너비는 24피트이다.
이후 팔보산 혁명묘지는 1991년 유골 안치자 범위를 현단급에서 사(司)국급 이상 지도간부로 조정해 일반인은 팔보산 혁명묘지에 안장할 수 없게 됐다.
일반인은 팔보산 혁명묘지(八宝山革命公墓)에 묻힐 자격이 없지만 팔보산 인민묘지(人民墓埋)에 묻힐 수는 있다.
팔보산 인민묘지(人民墓埋)는 1950년(팔보산 혁명묘지와 같은 해)에 건립되었으며, 건립 당시에는 '서교 제2공동묘지'로 불렸다.
공동묘지가 일찍 조성된 탓에 1950~60년대 조성된 시신관, 1980년대 조성된 토분, 1980년대 후반의 시멘트묘, 1989년부터 관리비를 받고 조성된 수마석성형묘, 석재묘 등 매장형태가 많은 현대식 묘원이다.
바바오산 인민묘지가 세워진 이후 묘지는 주로 베이징 주민과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바바오산 인민묘지는 지금까지 6만7000여 개의 묘소와 10만여 명의 사망자가 안장돼 베이징에서 가장 많은 무덤과 가장 높은 유골 매장 밀도를 자랑한다.
또한 납골당이 있는데 납골당에 들어갈 자리가 없는 사람은 A4용지 크기의 유골벽에 안치되며, 벽에는 사망자의 이름과 생몰년월일, 생전 사진이 새겨져 있고, 유골은 벽 안에 봉인된다.
벽면 납골당은 3, 4층의 가격이 한 칸에 2600위안, 1, 7층은 800위안으로 가장 쌌지만, 현재 가장 잘 팔리는 곳은 3층, 그 다음이 4층, 5층, 1, 2, 6, 7층은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바바오산은 점차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여 원래의 150무 묘지는 더 이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어 묘지의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가격도 치솟아 천이귀(陳贵) 개국 소장의 딸 천시(陳说)는 "친척 중 한 명이 2000년께 팔보산에 3㎡도 안 되는 묘지를 10여만 위안에 샀고, 5년 뒤 다른 친척이 사망해 가격이 20여만 위안까지 올랐고 면적도 몇 평방피트로 줄었다"고 말했다.
2묘역에는 무자비(無字碑)가 있는데 한 직원은 "현재 가격은 30만 위안"이라며 "이미 없어진 지 오래다"며 "무자비(無字碑)는 가족들이 이미 샀지만 유골은 아직 반입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납골벽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2005년을 전후해 20년 마다 약 3000위안, 8년 후에는 20년 마다 1만 위안이 된다.
그럼에도 팔보산에는 매년 1000부 안팎의 유골 예치 신청이 들어오고 있다.
지금은 우리의 국립묘지같이 많은 사람이 구경삼아 가보고 있는 곳이다.
가는 방법은 북경 지하철 1호선을 타고 팔보산 역에서 내려서 1km정도에 있다.